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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1-0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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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수능 이야기 - Prologue - [한심한 Pre-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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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lyle (220.♡.136.144)
 조회 : 8,126  추천 : 4  비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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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할 때 학점이 2.29였다. 특히 전공 평점은 2.01이었나, 2.03이었나. 너무나 부끄러운 숫자다. 물론 조금은 남다른 대학생활이긴 했지만 모든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저런 숫자는 어설픈 자기위로와 나태, 그리고 가족들을 기만하는 갖은 노력(?)이 없이는 얻기 힘든 학점이다. 사실 학과 공부가 적성에 안맞긴 했다. 복잡한 도르레를 역학적으로 풀어내는 건 너무 힘들더라.(사실 도르레 문제는 기초 4대 역학 중 가장 접근이 \'용이\'하다는 동역학에 관련된 문제이다.)
3학년 넘어가면서 미적분학도 모르는 내가 도저히 학과 공부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는, 졸업 후 병역특례에서 일하며 얻은 지식으로 전공이 아닌 다른 방면에 종사하는 선배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그냥 대충 졸업하고 병특(병역특례)이나 가서 프로그래머나 되자꾸나.
병역특례시장에 점차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이공계의 사기진작을 위해 만들었던 병역특례가 이제 줄어들 거란다. 그것도 내가 졸업하는 해인 2003년부터.(한심하게도 학교를 5년 다녔다. 10학기 Full로) 15000명이었던 병특 T/O가 7000명으로 줄어들었고 그즈음 되어 IT업계에도 한파가 불어 닥쳤던 탓으로 관련 지식과 경력이 전무했던 나는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저녁으로, 아니 하루 종일 입사원서를 내고, 틈틈이 관련 공부를 하고, 백방으로 알아보아도 특단의 조치 없이 병특 T/O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수 싸이도, 프로게이머 김동수도 병특을 시작했단다. 학교이름 하나로 병특을 골라가던 시대는 갔다보다. 내가 가진 건 대학 졸업장과 텅빈 머리, 그리고 옹졸한 자존심이었다. 안그래도 병특의 반 이상은 사장친구의 아들 내지는 비슷한 수준의 지인들로 채워졌는데, 반 이상이 뚝 잘려나간 T/O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당시 병무청 병특 구인 광고는 게시물 하나당 3000건이 넘는 조회수를 나타내고 있었다. 나와 같은 불쌍한 중생들이려니... 난 새벽에 집을 나서 무대뽀로 회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병역특례 T/O를 지정받은 회사에 쏟아지는 이메일은 1000통이 넘을테니, 방법은 그것밖엔 없었다.
2003년 2월말이었다. 새벽6시에 집을 나서 이력서 2통과 자기소개소 2통을 넣은 봉투를 들고 한 회사를 찾아갔다. 조그만 IT회산데 기획자를 뽑는다고 구인글에 적혀있었다. 나는 여직원에게 1분만에 쫓겨났고 회사 앞에서 사장님을 기다렸다. 10시쯤 나타난 사장에게도 쫓겨났지만 터벅터벅 걸어 도착한 지하철역에서, 면접이나 보고 가라는 여직원의 전화가 왔다. 나는 신에게 감사하며 달려갔고, 1달만에 다시 연락을 받아 3월말부터 일하게 되었다. 3개월은 인턴으로 일하고 6월에 정식으로 시작하는 조건으로.
...너무나 황당했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회사라도 병역특례 T/O 하나에 회사의 사활을 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나에게 기댈 언덕이 있냐고 물어왔다. 내가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한단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하는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것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내가 그냥 돈을 벌어와야 한단다. 예전엔 동네에서 두루넷 가입을 받아 본사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 살았는데, 거의 모든 집에 인터넷이 깔린 지금은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 대신 1~200만원 정도의 홈페이지 제작을 대행하여 꾸려나가고 있는데, 프로그래머 두명에 디자이너 한명이었다. 모두가 병특이었다. 프로그래머 한명은 회사 나가게 해달라고 사보타지 투쟁 중이었다.
나에겐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중소기업의 열악한 환경과 영세한 규모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병특에게 주는 싼 임금(연봉 1000만원 정도), 한번 들어오면 1년은 있어야 한다는 병역특례 조항을 이용하는 사장이었다. 나한테는 \'상권분석 시스템\'에 대한 자신의 꿈을 역설하면서 빨리 이걸 만들어서 돈을 벌어 오란다.(정말 이게 사장이 말한 전부다) 예전에 있던 병특이 만든 음식점 관리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프로그램을 배우는 초보들이 만드는 습작 수준이었다. 이걸 팔아오란다. 20만원에 팔면 하루에 하나씩만 팔아도 한달에 600만원 매출은 거저먹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과외 전단지처럼 광고문구를 만들고, 프린트해서 음식점을 돌며 팔아야했다. 당연히 팔릴 리가 없다. 구두를 신고, 양복을 입고 발이 부르튼 채 돌아다니며 든 생각은, 수세미를 팔러 다니라고 했으면 훨씬 잘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내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사장이 부르면 사장실에 들어가서 돈벌어오라는 소리를 두 시간쯤 듣는다. 말이 안 통한다. 사장의 뜻을 거스르는 말대꾸는 할 수 없다. 돈을 벌어와야 월급을 줄 것 아니냐라는 게 결론이다. 그러고나면 한 두개 진행 중인 홈페이지 잡일을 좀 한다. 프리랜서 한명이 만들면 일주일만에 뚝딱할 홈페이지를 서너명이서 한달정도 한다. 직원들도 일할 마음이 없고, 지휘체계도 엉망이었다.
그래도 꿈이 있었다. 돈을 벌어오는 기획자가 필요하다는 사장한테는 미안하지만, 6월에 편입(정식으로 병역특례를 시작하는 것을 편입이라고 부른다)이 되면 짬짬이 프로그램도 배워서 멋진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고, 내가 이 회사에 있는 동안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곳을 보다 나은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6월 초에 나를 어느 술자리로 데리고 가더니, 미안하다고 얘기했다. 사장 특유의 일그러진 입술로 일이 좀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병특T/O를 팔아야겠는데, 1억 정도에 팔 수 있을 것 같다고, 좀 나가줘야겠다고, 편입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자고 했다. 나는 화장실에서 울었다. 고작 3개월이었지만 내겐 3년보다도 긴 시간이었다. 술상이라도 뒤엎었어야 했는데, 내 간절함과 애원함은 그런 이야기마저 감내하게 만들었다. 언제나처럼 과장(사장 동생)네 집에서 2차를 하는데 그때 과장은 내게, 1억에 T/O 살 생각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비참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학벌 하나 믿고 나대던 대가인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상종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던 내 오만함에 대한 응답인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처절하리만큼 깨닫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이 되어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 시절 이후, 난 나의 벌거벗은 모습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20년만에 나는 그런 기회를 얻은 것이다. 1억이 없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여느때처럼 40분 일찍 출근하여 쓸고 닦고 화장실 청소하고, 이제 그만 가보라는 과장의 불편해하는 언사를 뒤로 한 채, 남은 두 명의 병특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회사를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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